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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d 칼럼] 영화 '피아니스트'
  • 정윤희 기자
  • 등록 2021-02-03 10:56:57
  • 수정 2021-02-03 13: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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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아니스트 최윤아의 음악가 이야기]

최윤아 단국대학교 교수, 스포츠닥터스 자문위원.

쇼팽에 대한 강의를 준비하던중 문득 영화 '피아니스트'가 떠올랐다.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의 작품으로 2002년 '칸느 영화제의 황금 종려상'을 수상했고 2000년대의 명작이라 불릴 만큼 수작인 이 영화는 회를 거듭하여 감상하여도 그 감동은 줄어들지 않았다.


유년시절 어머니를 가스실에서 잃은 뼈아픈 상처를 겪은 폴란스키 감독은 실제 실존인물인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슈필만의 회고록을 발견하고는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평생을 기다렸던 작품임을 깨닫고 영화로 만들어 내게 된다. 


1939년 폴란드 바르샤바. 피아니스트 슈필만은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하던 중 폭격을 당하면서 연주를 미처 다 마치지도 못한 채 피난길에 오른다. 모든 가족들은 나치에 이끌려 죽음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되고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그를 알아보았던 몇몇 사람들의 도움으로 그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며 은신처를 마련하게 된다. 전쟁의 폐허 속에 혼자 남겨진 그는 추위와 허기 그리고 고독과 두려움과 싸우며 오로지 생존에 대한 일념으로 살아남게 된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폐허가 된 건물 속에서 겨우 생존을 유지해 가던 그는 통조림 하나를 발견하고 뚜껑을 열려던 순간 독일 장교에게 발각되고 만다. 그가 유태인 도망자임을 눈치 챈 독일장교는 그의 신분에 대해 묻고 이미 삶을 포기한 슈필만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I am...I was a Pianist" 자신은 피아니스트였다고 대답한다. 독일장교는 피아노를 한번 쳐보라고 요구하고 슈필만은 추위와 허기로 꽁꽁 얼어붙은 자신의 손가락을 한참 바라보다가 어쩌면 지상에서의 마지막 연주가 될 수도 있는 그 순간 자신의 온 영혼을 다해 연주를 시작한다. 굳었던 손가락 탓에 어눌하게 시작된 쇼팽의 음악은 곧 슈필만에 의해 다시 살아나고 죽음을 코앞에 맞이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쇼팽의 음악은 그를 가장 자유롭고 순수한 예술혼에 빠져들도록 이끈다.


그의 연주를 들은 독일장교는 슈필만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며 그가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이 독일군 장교의 실제 이름은 호젠벨트(Wilm Hosenfeld)로 종전 후 1952년 소련의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 영화 속에서 너무나 비참하고 잔인하게 하지만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전쟁의 상황들은 나도 모르게 치를 떨게 만들었고 이 모든 상황들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아름다운 쇼팽의 선율은 어두움 속에서 더욱 찬란하고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이지만 유학시절 국제콩쿠르에 나갔다 전시를 맞은적이 있었다. 지금은 지난일이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급박하고 끔찍했는지 지금도 그때의 절박했던 상황들을 떠올리면 간이 서늘해짐을 느낀다.


유고에서 열렸던 자그레브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게 되었고 (사실은 정부에서 한국인인 나에게 비자 발급을 해주지 않았어야 옳았는데) 당시 해외 정세에 민감하지 않았던 나는 비자발급이 되었음에 안심을 하고 콩쿠르 참가를 위해 유고슬라비아로 날아갔다.


예선까지 4일정도의 시간이 있었고 나에게 주워진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의 연습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들도 나는 하루 종일 호텔방에서 머리로 연습을 계속하며 준비를 하였다.

당시 동구권 국가들의 참가자가 많아서 그랬는지 분위기도 그리 친절하지만은 않았고 연습할 수 있던 피아노도 거의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의 아주 낡은 피아노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예선을 통과한 후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세미 파이널 프로그램을 준비하려 하는데 주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이 느껴졌다. 우선은 뉴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고 통역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몇몇 영어를 하는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다음날이 되자 곧장 일본 대사관과 독일 대사관에서 콩쿨 장소로 사람을 보내 자국민을 데리고 갔고 그리스, 이태리등의 참가자들이 차례로 유고를 빠져나갔다. 바로 공항은 봉쇄되었고 남은 사람들은 거의 동구권 사람들 뿐이었다. 나는 갑자기 시작된 폭격소리와 공포와 맞서게 되었고 그 와중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연습하러 간 러시아 학생들이 있었고 심사위원중 한명이 걱정하던 나에게 콩쿨이 계속 될테니 걱정 말고 연습하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참가자들은 밤마다 아무도 방을 지키지 못하고 호텔 복도에 나와 공포 속에서 밤을 지세워야 했다.


한국에서는 어머니가 백방으로 알아보시고 대사관을 수소문 하셨지만 유고에는 북한 대사관만 있었기에 당시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상황은 커녕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었다. 점점 상황은 안 좋아지고 그때 나는 생전 처음 죽음의 공포가 어떤 것인지 맛보았다. 언제라도 폭격탄이 우리가 머물던 호텔에 날아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나는 당시 아르매니아에서 온 세 친구들의 도움으로 헝가리로 가는 마지막 기차표를 살 수 있었고 가까스로 유고를 떠날 수 있었다. 떠나는 기차속에서도 폭격음들은 게속되었고 약 12시간 후 다행히도 목적지인 부다페스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부다페스트의 공항에서 독일 루프트한자에 도움을 요청했고 다행히 공항에서 나의 비행기표를 바꾸어 주어 무사히 다시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때 나는 전시의 공포를 경험해 보았었다. 급박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본모습들도 볼 수 있었고 그때 나를 도와주었던 이들은 가난한 아르매니아의 낯선 친구들이었던 것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독일 호젠벨트 장교는 슈필만에게 묻는다. 이 전쟁이 끝나면 무엇을 할 거냐고... 슈필만은 다시 피아노를 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전쟁으로 인해 온 가족과 동료들을 송두리째 잃은 슈필만의 가슴은 아마도 예전의 슈필만의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혹 그는 기억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전쟁으로 갈기갈기 찢기고 피폐해진 마음으로 다시는 예전과 같은 미소를 찾지 못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다시 연주를 하기 시작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존재한다. 음악가의 삶도 어쩌면 그러한 숙명과도 같은 것인 것 같다.


스포츠닥터스는 이 시간에도 전 세계 곳곳의 치료를 받지 못해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귀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나 또한 한사람의 음악가로서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 공연장에서 음악을 연주할 것이고 또 자문위원으로서 희망의 콘서트도 계획하고 있다. 삶과 죽음, 심지어 심각한 감염병과 전쟁의 공포, 이 모든 것들도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앗아가지 못했던 것처럼 인류를 돕고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내려는 스포츠닥터스의 봉사정신과 음악 또한 언제나 우리와 함께 영롱한 빛을 비출 것이다.




          글: 최윤아 (현 단국대학교 교수, 스포츠닥터스 자문위원)


독일 하노버 국립음대 연주학학사, 석사, 최고연주자과정 졸업.

이태리 페스카라, 미국 맥매헌, 영국 하버힐, 스위스 마스터플레이어스 국제콩쿠르 등 우승

독일 괴팅엔 심포니, 체코 프라하 심포니, 헝가리 사바리아 심포니, 영국 하버힐 심포니, 

 KBS교향악단, 유라시안 필하모니, 울산시향, 마산시향 등 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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